*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시. 샌안토니오 스퍼스.





"…어?"


쿠로코는 낯선 천정을 보며 눈을 떴다. 낯선 방, 낯선 침대, 낯선 이불, 낯익은 파자마.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구속은 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납치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넓은 방에 추적추적 방문까지 걸어간 쿠로코는 잠시 고민하다가 죽였으면 잠자고 있을 때 죽였겠지 라는 생각에 아마 침실로 추측되는 방의 문을 열었다.


'…넓네요.'


문을 열고 펼쳐진 장소는 방처럼 넓었다. 


'아마 저기쯤이 거실이고. 계단이….'


거실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가자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창문 밖으로 커다란 호수와 숲이 있었다. 쿠로코는 창문 가까이로 가 감탄했다. 


'본격적인 서바이벌 게임인가요.'


숲과 호수, 갑작스런 이동. 쿠로코는 그 정도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쿠로코가 흠칫해서 뒤돌아보자 익숙한 색의 붉은머리가 보였다. 


"테츠야, 일어났어?"


익숙한 얼굴, 익숙한 눈동자. 그렇지만,


"아카시군, 언제 그렇게 컸습니까?"

"…어?"


누가봐도 소년이나 청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인 상대가 쿠로코의 말대 당황해서 대답했다. 



*



"고등학교 2학년인가. 과연."


쌀밥과 미소시루, 종류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생선구이에 매실절임, 계란말이. 누가 봐도 일식이라는 느낌의 상에 쿠로코가 위화감 없이 밥을 한입 씹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쿠로코에게 대충 이야기를 듣고 맞은편에서 턱을 쓰다듬고 있던 아카시가 작게 웃었다.


"쟈포니카 쌀이 아니라서 그래."

"쟈포니카? 입니까?"

"그래, 주로 일본이나 한국에서 먹는 쌀은 쟈포니카종. 네가 지금 먹은 건 칼로스라고, 동남아쪽에서 먹는 인디카 품종과 중간 쯤 되는 거야."

"아카피디아는 필요없습니다…."


쿠로코가 아카시+위키피디아의 합성어쯤 되는 것을 투덜거리며 생선을 한점 발라냈다. 이것도 맛내기는 익숙치 않은 향신료가 들어간 것 같지만 생선이 싱싱해서 맛있었다. 아니, 만든 사람의 실력이 좋은건가. 맛있는 건 만국공통이니까.


"텍사스에서는 일식을 구하기가 힘들거든. 요즘이야 스시나 롤 같은 게 유명해져서 구하기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지인 입맛에 맞춘 거니까."

"그렇습니까."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한 쿠로코가 다음 순간 굳어졌다.


"여기, 미국 입니까?"

"응."


아카시의 웃음은 상쾌했다.



*



식사 뒷정리는 아카시의 몫이었다. 도와주려던 쿠로코를 안심시키고 그대로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혔다. 


"이쪽은 와인바."


그렇게 말한 아카시가 닦은 식탁을 구멍속으로 밀어넣었다. 쿠로코는 저런 식으로 되어 있는 거냐며 몰래 신기해했다. 


'아니, 그 전에 아카시군이 집안일.'

"여기서는 원래 둘이서 하는데. 오늘은 뭐, 특별하니까."

"설마 남은 한 명은 나입니까?"

"누구라고 생각해?"

"보통으로 생각하면 나겠죠. 다른 사람과 바뀌었다는 것보다는 그게 현실성있고, 무엇보다 올라올 때 내 이름 불렀잖아요."

"난 가끔 가다 그렇게 오만한 테츠야가 좋더라."

"오만? 합니까?"

"내 주위에 태츠야가 한 명 밖에 없을 줄 알았어?"

"아."


입을 딱 벌린 쿠로코의 모습에 아카시가 큭큭 웃으며 설거지를 했다. 쿠로코는 다시 한번 충격을 먹었다. 쿠로코는 와인바에 앉아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음, 그래서 아카시군은 몇살입니까?"

"몇살로 보여?"

"서른은 안 된 것 같고."

"그래?"

"…모르겠습니다. 아, 정말 이게 미래라면 모르는 편이 낫겠죠."

"꿈이라면?"

"꿈이라면 내가 생각을 해내지 못한 것일테니 답변이 돌아오지 않겠죠."

"우문현답이군."


아카시는 시종일관 유쾌해보였다. 마침내 설거지를 끝낸 아카시가 쿠로코의 곁에 다가왔다.


"초콜릿 줄까?"

"바닐라 쉐이크는 없습니까?"


아카시는 대답 대신 와인바 안쪽을 가리켰다.


"바닐라 쉐이크!"


쿠로코가 벌떡 일어났다. 마지버거에서나 볼 수 있는 바닐라 쉐이크 기계가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아아니, 먹어도 됩니까?"

"네가 사서 들여온거니까 마음대로."


그러나 가정교육을 확실히 받은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허락을 요구했다.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대답을 해주었다.



*



쿠로코가 바닐라 쉐이크 두잔째를 마시고 있을 무렵, 어디론가로 사라졌던 아카시가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커피향이 좋네요."

"응. 직접 블렌드한 원두를 내려서 만든거야."


'역시 아카시군.'


쿠로코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커피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 한다. 말을 잇기 위해 물어봤자 모르는 단어만 나올 뿐이다. 


"자, 그래서, 조금 진정 됐어?"

"아뇨. 여기가 미국 텍사스인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디입니까?"

"별장이야."


아카시가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며 쿠로코가 바닐라 쉐이크를 홀짝홀짝 마셨다.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긴, 정말 미래라면 과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는 편이 좋죠."

"테츠야는 상상력이 좋아서 좋아."

"…틀렸습니까?"


쿠로코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정답."


아카시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



"점심은 뭘 먹고 싶어?"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방금 디저트를 먹은 걸로 압니다만."

"하하, 그렇지만 여기서 테츠야가 할 것도 없으니까 저절로 식사에 생각이 가게 되네."


영화도, 책도 볼 수 없다. 미래니까. 숙제도 같이 딸려오지 않았으니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농구공도 없습니까?"

"있기야 있지만. 여기까지 와서 농구야?"

"그럼 여기까지 와서 할 게 농구 밖에 더 있습니까."

"역시 우문현답이군."


아카시가 낄낄 웃으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처음 보는 웃는 방법이었다. 별장이라지만 쿠로코의 집 몇개는 들어갈 것 같다. 평소에 집 넓이 같은 건 생각해보면서 살지 않았지 때문에 정확히 몇개가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아카시는 금방 다시 나타났다. 한 손에 농구공이 들려있었다. 


"자, 근방에 사람 없으니까 길 잃지 않게 멀리 가지는 말아둬. 난 점심이나 준비하고 있지."

"아카시군이 점심…."


쿠로코는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충격을 다시 받고 있었다. 



*


아카시가 안내해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쿠로코는 무엇보다 먼저 경치에 감탄했다. 그렇지만 얼굴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병아리마냥 안내하는 아카시 등 뒤로 졸졸 쫓아갔다.


"여기가 농구코트."

"역시 있네요."

"응, 어쨌든 너나 나나 결국 농구롤 좋아하니까. 그렇지만 별로 사용한 적은 없어."

"왜 그렇습니까?


쿠로코의 순수한 의문에 아카시가 작게 웃었다.


"정말 알고 싶어?"


아카시가 장난어린 듯한, 떠보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쿠로코는 미래에서 아카시의 처음 보는 모습을 많이 본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진지한 쿠로코의 반문에 아카시가 머쓱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묻지 않겠습니다."

"좋은 아이구나."


아카시가 그렇게 말하고는 점심을 준비하겠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건물이 햇빛을 반사했다. 아니, 커다란 창문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쟀든 건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한참 운동한 뒤의 점심은 꿀맛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일식이 아니라 파스타였지만. 예쁘게 플레이팅된 파스타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인 것 같았다. 물론 맛도 훌륭해서, 누가봐도 소식인 쿠로코가.


"더 없습니까?"


라고 말하게 만들었다. 아카시는 조금 크게 눈을 뜨더니, 다시 미소지었다.


"응, 더는 없고, 조금 있다가 티타임이나 가지자. 그리고 요리하면서 생각해봤는데 예전에 나온 책이라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농구는…."

"내가 불안해서 안 될 것 같아. 주변에 민가가 없는데다 너는 여기 지리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나도 남자입니다. 봐주세요, 이 알통!"

"알통과 남자인 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쿠로코는 아카시의 부탁에 입을 다물고 긍정했다. 아카시의 부탁이라니. 부탁이라니. 매우 레어하다! 


'아.'


그러다가 문득, 쿠로코는 깨달았다.


'아카시군, 나俺라고 하는데 나는 테츠야로군요.'


조금, 신기한 발견이었다.



*


티타임은 생각보다 본격적인 것이었다. 쿠로코의 시간으로 얼마 전에 샀지만 아직 읽지 못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여기서는 매우 손때가 묻어 있었다.)을 희희낙락하며 읽다가 아카시의 부름에 1층으로 내려온 쿠로코는 조금 놀랐다. 바닐라 쉐이크를 달라고 할 셈이었는데. 3단 트레이에 빼곡히 쌓여있는 디저트와 찻잔이 매우 예뻤지만, 쿠로코에게는 문화충격 같은 것이였다.


"…티타임, 입니까?"

"그래, 영국식."

"아침은 일식에, 점심은 이태리식에, 오후는 영국식이군요."

"원래 좋은 건 다 취해보는 법이야. 저녁은 프랑스식으로 할까?"

"아뇨, 일식으로 해주세요."


쿠로코의 단호한 말에 아카시가 다시 작게 소리내며 웃었다. 


'아, 그렇네요.'

'나는 오늘 아카시군의 처음 보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있어요.'

'거의 5년간 알아왔지만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쿠로코가 멍하니 있자, 아카시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쿠로코 앞에 있던 찻잔에 쪼로록 주황색 같은 액체를 따라주었다.


"이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얼그레이 품종. 한번 마셔봐. 향을 맡고, 그 다음에 입안에 골고루 닿듯이 음미하고, 그래, 그렇게."


아카시는 매우 손에 익은 모습으로 쿠로코에게 먹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트레이는 밑에서 부터 먹는다던가. 차는 향도 즐기는 것이라던가.


아카시가 차를 마시는 모습은 우아했다. 아마 쿠로코에게 알려준 건 쿠로코가 즐길 수 있을만큼의 예절이겠지. 


쿠로코는 문득 같은 나이의 아카시가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나이의 아카시한테서도 처음 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기, 나,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글쎄. 금방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듣기에는…."

"들었습니까?"


아카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샌가 아카시쪽으로 상체를 빼고 있던 쿠로코가 진정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카시군."

"응?"

"나, 어쩌면 아카시군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큽, 콜록, 콜록,"


홍차를 마시던 아카시가 사레가 들린 듯 갑자기 기침을 했다. 한참 손수건으로(쿠로코는 정확한 명칭을 몰랐고, 아카시도 가르쳐줄 여유가 되지 않았다.) 입을 막고 기침을 하던 아카시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건 말하는 건 쉬워도 듣는 쪽은 파괴력이 말이 아니네."

"말했습니까?"


아카시가 대답 대신 웃었다. 아, 얼버무리려는거구나. 쿠로코는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 돌아가서 말해줘. 테츠야."

"…농담 아닙니다."

"응, 알아."


아카시가 이번에는 눈꼬리까지 휘며 웃었다.



*



그날 밤, 메뉴는 돈까스였다. 저녁에 먹기엔 묵직한 메뉴를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쿠로코를 보고 아카시가 "승리해야지?" 라는 말을 건넸다. 농구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또다른 뭔지는 모르겠지만 쿠로코는 그 말에 순순히 납득해 입을 다물고 돈까스를 먹었다. 밥은 사양했다.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을 모두 보고, 아카시가 2층 거실에서 뭔가 서류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아침에 일어났던 침대에 들어갔다. 


누워서 눈을 감고, 바람에 나무가 스치우는 소리를 듣다가, 어느샌가 잠이 든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쿠로코는 '아카시군 지금 도쿄일까요.' 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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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os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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